봄이오는 수렴동 풍경들


 

오늘 낮 수렴동 계곡의 모습입니다.

깊은 눈속에 갖힌 계곡이지만

돌돌 물소리는 숨길 수 없습니다.

계곡의 해는 빨리 떨어집니다.

초저녁 북녁하늘에는

초생달이 나무 가지에 희미합니다.

금방 피어오를 날을 알면서도

사뭇 기약없는 사람의 일처럼

저 달도 그런건 아닌가 공연히 마음이 쓰여지는 밤입니다.

낮에 가본 수렴동 계곡에는

아름다운 발자욱이 그림같습니다.

서로 다른 두 자취가

다르지 않게 다정히 물가를 비끼며 걸어간

흔적은 아름답기만합니다.

오늘은 딱 이만치만하며

발길을 돌립니다.

내일은 또 내일은

날로 부풀어오르는 계곡의 물소리마냥

설레임 가득한 내일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

사람사는데가 좋은 산도야지, 사람이 좋은 산도야지? 풍경들



 무엇이냐고요?

산도야지랍니다

기르는 거냐고요?

멧돼지라고...하니까 물론 아니죠 ^^

매일같이 탐방안내소에 마실오는 도야지가 있다는 애기는 들었는데

그만 오늘 아침 딱,

마주치고야 말았지 뭡니까.

다 큰거는 아닌데 은근 귀엽더라고요.

곁 2m 남짓되는데로 지나갔는데도 약하게 그르렁댈뿐...

사람에 많이 익숙해진 모양에요. 나이도  한 두살쯤 됐을까 싶은거이

살집이 통통한데 평소 등산객들이 주는 먹이에 익숙해진 모양

아직 사람 무서운줄 모르는 놈인게 분명한데

부디 죽는 그날까지 사람 무서운줄 모르고 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네요

사람과 사람의 거리도 만만찮은 세상에

이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산짐승을 가까이서 대하는 느낌!

급 상승하는 짜릿함이란

이런게 우리 본래 동물의 야성아닐까요
 
낯선 흥분 말입니다 날 것 그대로의!





눈오는 날의 백담 풍경들


오늘 백담사 계곡의 풍경입니다

눈이 오기로 했었는데

사진을  찍고 나선

펄펄   훨훨ㄹ

 

계곡으로 나리는 눈은

때로는 부유하고

때로는  흐느적대며

소용돌이치고

휘몰아대지만

 

눈오는 날

사방은

고요하고

고요할뿐

 

들리는건

결국

내안의 소음

내안의 어지러운 갈망 뿐

 

 희미함은 때론 

아우성인걸 알게됩니다

 

눈은 천지를 소요하며

대지를 덮습니다.

 

천지는 동색으로 화하고 

모든 것은 날 섬을 버리고

다만 윤곽으로만 희미해져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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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변해가는

천지간을 지켜 보며

시간은 눈처럼 깊어져갑니다


코맥 맥카시의 '로드'를 읽고

가을 내음을 슬쩍 흘리는 산천이지만 아직은 덥다. 태풍이 쓸고간 계곡가에는 부서진 잎새가 바닥에 자욱하다. 뭉게구름은 푸르른 하늘가를 흘러간다. 노릇한 햇살은 반짝이는데 잠자리는 더는 날고 싶지 않은가 보다. 자꾸 어디간에 앉으려고만 한다. 그처럼 심심한 시간들이 냇물처럼 흘러간다. 머지않아 이 계곡에도 바람은 들고 가을빛은 찬찬히 내릴 것인데.. 오늘 소금강의 풍경이 이렇다. 작년 그맘때도 재작년 그 즈음에도 산천의 빛깔은 비슷했으리라.

그런데 이런 호시절(?)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는 없는 모양이다. 추측이 아니라 통계적 사실의 애기다. 과거 지구 지질학적 역사에 기록된 생물 대멸종은 다섯 번이다. 그때마다 지구상의 주인공은 완전히 바뀌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여섯 번째의 대멸종을 애기하고 있다. 다만 이번 건은 인간에 의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과거 다섯 번의 대멸종은 대부분 외계 운석이나 혜성과의 충돌에 의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코맥 맥카시의 소설 ‘로드’의 배경은 지구 멸망후의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은 온통 잿빛과 검댕으로 덮혀 있고 먼 산은 아직도 불타고 있는 어느 날, 살기위해 끝없이 끝없이 남으로 향하는 어는 부자의 애기가 소설의 골격이다. 해는 잿빛 구름에 덮혀 길을 잃고 냉각된 대지에는 검은 눈발이 쉴새없이 내린다. 파괴된 인간 문명은 세상에 무기물로 남지않고 폐허와 쓰레기의 경관을 만든다. 아들과 아버지는 먹이를 찾아 산야를 헤맨다.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사람과 동물의 경계에서 넘나든다.


소설의 배경으로 짐작되는 시대는 거의 오늘날과 같다. 지구의 끝날이라고 소설에선 우주선도 로봇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불타오르는 대지아래 온통 그을린 세상만이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전부다. 소설의 압권은 지구멸망 후의 이 세계의 모습에 대한 생생한 표현에 있다. 소설에서 멸망의 원인에 대한 애기는 없다. 그것이 핵전쟁에 의한 것이든 운석과의 충돌에 의한 결과든 다만 파괴된 세상의 모습만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문명의 끝에서 생존해나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전할 뿐이다.


‘로드’에 묘사된 세상의 끝 날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참혹하다. 아마도 세상 끝 날 우리의 모습은 정말 그러할 것이다. 사람으로서 살 수 있는 존재여건이 박탈된 세상에서 동물로서의 생존 욕구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면 잉여의 먹거리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 바탕위에서야 겨우 피어날 수 있는게 우리의 문명이란 것이 아닐까.

소설속의 아버지와 아들은 겨우 겨우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여행의 종말로 향해간다. 지구의 끝날 세상의 희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들은 이 세계를 다시 일으키는 선구자로 남을 수 있을까?

과거보다 풍요롭다지만 세상은 더 살기 어려워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짓된 진실이 세상을 희롱하고 불의는 정의의 탈을 뒤집어쓰고 횡행한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끓고 어디선가는 엄청난 수의 사람이 소리 소문없이 굶어죽는다. 그런데도 나는 모른다.


이런 세상 끝 날 같은 시대에서 ‘사람이 산다’ 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검은 눈을 맞으며 세상의 끝을 여행하는 부자의 모습을 눈물겹게 지켜본다.


‘소금강청학동’ 그 면면히 흐르는 푸르름

7월 초하의 소금강청학동은 부슬비가 소슬소슬 내리고 있습니다. 가는 빗줄기에 계곡가의 가래나무, 물푸레 잎사귀가 싱그럽습니다. 소금강청학동은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 속하는 국가명승지 제1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오대산을 남북으로 가르는 백두대간을 경계로 영동지역에 위치하는 이곳은 예로부터 수려한 풍광으로 이름 높습니다. 소금강청학동은 무릉계부터 시작됩니다. 선계를 일컫는 이름처럼 여기서부터 작은 금강(小金剛) '소금강청학동'의 풍치는 펼쳐집니다. 청학동을 찾는 길은 대로(大路)가 아닙니다. 예로부터 무릉의 선계는 아무나 접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청학동으로 드는 길은 계곡가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혼자 걷는 길입니다. 그 길은 계곡의 파란 물과 자기 앞에 드러나는 오솔길을 응시하며 걷는 사색의 길입니다. 지금 부슬비 내리는 청학동에도 들리는 것은 다만 조용한 빗소리일 뿐 나그네는 발걸음은 자취 없습니다.


무릉계에 들어선지 얼마지 않아 빗줄기는 천애(天涯)의 십자소, 검푸른 그곳에 파문을 그으나 연해 물길은 잠잠할 뿐입니다.

 청학동으로 드는 오솔길은 금강송과 굴참나무의 길입니다. 하늘을 향한 금강소나무의 굵은 몸이 빗줄기에 붉습니다. 지난 겨울 폭설에 찢기운 설해목(雪害木)은 성하(盛夏)의 초목에 가려 자취없습니다.


계곡가로 길을낸 대크 아래 연화담 푸른물이 넘실댑니다. 버들개, 금강모치 등이 한가로인 물살을 타고 노닙니다. 마의태자의 전설이 어린 식당암(食堂巖)을 지나 발길은 어느덧 구룡폭에 닿습니다. 소소한 물줄기를 날리는 구룡폭은 때를 기다립니다. 큰비 나리고 하늘의 기운이 동한 어느 한날 아홉폭 화강암 단애에 굽이굽이 늘어선 구룡폭은 승천의 포효로 청학동에 메아리칠 겁니다.


구룡폭에 잠시 마음을 씻기다 발길은 다시 만물상에 닿습니다. 만물상이 자리한 골은 온통 구름에 잠겨있습니다.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구름으로 만물상은 천변만화합니다. 만물상 주변 수직 단애마다 성성한 금강송의 푸른 줄기로 흐르는 구름은 푸른학이 노니는 이곳 청학동(靑鶴洞)의 유래를 짐작케합니다.

만물상을 지나 백운대, 광폭포, 낙영폭포를 오르면 해발 1,338m의 노인봉에 오르게됩니다. 노인봉은 백두대간의 한 봉우리로 남으로는 대관령에 닿고 북으로는 신배령을 지나 설악산으로 이어집니다.

소금강청학동을 지나 노인봉, 진고개의 백두대간에 오르는 길은 온몸과 마음이 무장해제되는 선정(禪定)의 길입니다. 산정에 흐르는 구름처럼 바람결에 풀어진 몸과 마음은 송천약수 물로 정돈하셔도 좋습니다.

지금은 안개와 구름의 날들, 그러나 또 어느 한날 소금강청학동은 쪽빛하늘 붉은단풍으로변모할 겁니다.


오월의 푸르른날, 박수근 기념전을 돌아보고

삼일만에 돌아온 소금강의 하늘은 낮게 찌푸려 있습니다.

약간은 서늘한 아침기운에 내피를 껴입고 오종종 돌아다니게됩니다.

지난 화요일 우아하신 두분 보살님을 모시고 다닌 삼청동 길이 더 화사했던 것 같습니다.

듀오모님의 소개로 예전엔 미처 몰랐던 삼청동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딜가도 멋스러운 곳이 별로 없었는데, 심지어 인사동 문화거리마저 그게 한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공간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의외로 삼청동 곳곳에선  나름 아취있는 서울 고도의 멋을 느끼게 됩니다.

다분히는, 오월의 찬란한 신록이 건물을 감싸안고 작은 화단에선 아기자기한 꽃들이 피어나는 조경의 덕이기도 하겠지만은요.

그중 어는  한건물, 낡은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의 외양이 인상에 남습니다.

늦은 일제나 오육십년에 지어진 건물이 아닐까 싶은 고적함과 바래진 세월의 이끼가 묻어나는 건물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비슷하게는 아니지만 나름 살아온 인생의 길이가 있는 만큼 지나간 것들에 애정이 담기는 것은, 이젠 자연스런 감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들어간 갤러리 현대에선 박수근 45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시골 초가집의 볏짚으로 올린 이엉의 색채가 그렇지 않을까,  오뉴월 뙤양볕에 달궈진 마당흙이 굳은살 농사꾼의 맨발에 다져져

만들어진 색채가 그렇지 않을까 싶게 박수근의 마티에르는 한국인의 정서에 와닿는 무언가를 남깁니다.

그시절, 한국전쟁의 피폐함과 전후복구의 암담했던 시절이 화폭가득 담겨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건

참담한 시절의 고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이 연대하고 자연과 사람이 조응하는 평화의 기운에 마음젖게 됩니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장난을 하거나 공기놀이를 하고 놉니다. 부모가 일하고 나가 어린 동생을 들쳐업은 맏누이는

그런 아이들 곁을 벗어나지 못하고 문간에서 어정댑니다.

장마당에서 돌아오는 어머니 뒤를 아이와 강아지는 신나게 뒤쫓아갑니다.  많은 그림에서 어린아이는 엄마품이던지, 할아버진 품이

던지, 누이의 품이던지 누군가에게 안겨있습니다.

장마당에서 조을던 피곤함이 상접한 아낙네 주변에도 이웃은 있습니다. 그 이웃들은 지금과 같은 그저 타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

언제든 서로 감응할 수 있는 존재로 화폭속의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심지어, 헐벗은 나목의 존재마저도 슬픈 사람들은 감싸듯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박수근의 그림이 우리들의 정서에 남기는 따스함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삼청동의 몇몇 낡은  건물들은 박수근의 그 시대를 상기시킬뿐더러, 다음의 시도 떠올리게 하더군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란 시인데, 그중의 몇구절을 연상케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칼날같은 아름다움 산천 그리고 죽음


오대산국립공원에서 진고개라는 곳의 풍경입니다.

1월 6일날  많은 눈이 온 후 크게 추워진 날입니다.

 살을에는 추위로 만물이 얼어붙은 이날 진고개에서는 동사자가 있었습니다.

 주문진에 사는 정신이상자라 하는데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도로 언저리에서 얼어붙은채 발견되었답니다.

 평소에 엄마찾으러 간다고 산으로 자주 다녔다는 경찰의 조사 후문을 들었습니다.

 이 엄동설한 순백의 칼날같은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산천이 무장한날 죽음은 참

 특별한 의미없습니다. 한 생명이란 것이 평범한 것은 아닐진데, 그 존재의 값어치를 어떻게 매겨야할지는....

 글쎄요...숙제겠지요.

 문득, 고은의 "문의마을에 가서'란 시가 생각나네요.

 그중의 한구절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이우는 달 차오르는 한해의 시작


국립공원의 새해 첫날은 새벽 산행으로 시작됩니다.

탐방객들과 함께 노인봉을 오르는 길에는 보름달이 함께하고 산길은 언제나 하얗게 빛납니다.

2007년부터 매년 올랐지만 단 한번도 흐린날을 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든 환한 달은 새벽길을 비추며 나무들 사이로 길을 밝혀주었습니다.

 

겨울날 눈덮힌 산야에 내리는 달빛에는 아취가 있습니다.

한낮의 햇볕이 주지 못하는 그 은은한 감동은 새벽같이 겨울산을 오르는 자만이 누릴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 세계는 얼마나 풍요로운지...

 

도시문명이 결코 주지 못하는 이 아름다움은 가슴으로 느껴야합니다.

그래서야 이 칼날같은 바람이 휘몰아대는 산에도 하늘은 밝은 빛을 창공가득,,,온천지에 내리는 까닭을 알수있습니다.

 

먼동이 트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달은 동대산 기슭에 다가앉고

백두대간의 검은 산줄기 너머로는 새해를 일으키는 여명이 물들기 시작합니다.

달과 해가 이루는 조응

이울고  차오르는 천지간의 조화를 느껴 받는...가슴벅찬 환희로 2010년의 한해를 시작해봅니다.

 


한겨울의 물길 풍경들


 
  어제 하산길에서 마주한 계곡의 풍경이요

  이 징한 한파에도 물길은 그 몸를 다 얼리지 않고  강심깊이 흘러내리고 있었오

  돌이켜보면 그 어떤 두터운 얼음장도 그만큼 이상의 깊이로 흘러가고 있을 것인데

  우리네 마음의 얼음장도 그처럼 속깊이 흘러가고 있지 않겠오


"파주"의 은모, "뉴문"의 벨라, 그들의 사랑을 보며 마음에 남는 이미지

지난 주말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에서 영화 "파주"와 "뉴문"을 보았습니다.

 

이른아침 광화문 거리에는 찬바람이 쌩쌩대고, 저멀리 씨네큐브광화문을 상징(?)하는 망치든 거인상은 더욱 추어보였습니다.

 

찬바람에 떨어진 은행알은 진한 냄새를 풍기며 움추려 뛰어가는 발밑에서 나뒹굽니다.

 

후우~~ 서울 빌딩가에서도 열매는 달린다는 이 새삼스런 사실에 일순 나는 감동하고, 알을 품는 은행나무...그 도시의 벅찬 삶에 경의를 표하며 상영 시간이 멀지않은 보도를 종종 내달렸습니다.

 

영화 "파주"는 사랑에 대한 어린여자의 성장통을 담았다고 할까.. 복잡한 사랑의 감정에 쉬이 굴복할 수 없는 젊은 여인의 내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상대가 형부여서 일까요? 갑작스런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안은채 유일한 보호자로 남은 형부에 기대며 성장하는 여인은 형부에 대한 마음이 커갈수록, 깊은 내면의 갈등에 부딫히게 됩니다.

 

내면의 큰 고비마다 그녀가 취하는 방법은 형부에게서 멀어지는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얼마나 아프게, 이미 커져버린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인가요.

 

한번은 긴 여행으로 자신의 마음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갖고자 하는 젊은 여인은, 다음번에는 부정할 수 없는 스스로의 마음을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라는 블랙홀에다 처박아버리는 방법으로 마주서고자합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도피로 보이기도 하지만, 글쎄요... 도피였을까요?

 

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심을 부정하지 못하는 젊은 영혼의 더 큰 긍정을 향한 아픈 몸부림은 아니었는지 생각했습니다.

 

“파주”가 모호한 내면의 아픔으로 고뇌하는 어린여자의 이야기라면, “뉴문”은 한결 가볍고 모호하지 않은 이야기로 다가섭니다.

 

전편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멋진 젋음과 매혹적인 이야기로 과시한 두주인공 벨라와 에드워드 커플의 위기는 떠남에서 비롯됩니다.

 

벨라의 안전을 위해 떠나간 에드워드를 그리며 벨라는 많이 아파합니다. 그 아픔은 보호자를 잃은 어린아이의 고통에 다름없습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마음은 자신을 위험속에 빠뜨려셔야 비로소 보여지는 에드워드의 환영으로 위로받고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얼마나 부숴지기 쉬운 살얼음 같은 마음입니까...

 

뉴문을 보는 두시간여동안 매혹적인 남녀 주인공의 젊음과 화려한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는 영화 “파주”와 “뉴문”의 두 여자 주인공 은모와 벨라의 사랑이 주는 감흥은 무척 다릅니다.

 

모호하여 쉽게 잡히지 않는 “파주”의 어린 여자 은모의 아픔이 쉬이 잊히지 않는 까닭은 내자신도 스스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채 허허로운 일상을 보내는 날들이 많다는 것을 아프게 떠올렸기 때문은 아닌지...생각합니다.

 

 

 

 

 


오대산의 신갈나무 생명부양환경을 위하여

   오대산의 주인은 신갈나무일지 모릅니다. 그만큼 오대산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데  해발 700m 이상의 고산지대 대부분은 신갈나무 군락이 우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갈나무는 참나무 중에서 고산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종입니다. 우리가 흔히 참나무나 도토리나무를 애기하지만 실제 참나무라는 개별 종은 없고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를 통칭하는 말일뿐입니다. 우리말에서 ‘참’이란 표현이 최상의 긍정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들 참나무들은 사람이나 야생동물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는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로봉의 신갈나무숲


예로부터 도토리는 서민들의 귀한 식량이었지만 먹을 게 풍족해진 지금도 도토리는 많은 이들이 찾는 건강식품입니다. 참나무에서 얻어지는 숯은 또 어떻습니까. 숯은 과거에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의 연료로 애용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선 그 활용도가 연료의 차원을 넘어 전방위에 걸치고 있습니다. 탈취제을 비롯한 벽지나 장식재, 화분재로 널리 활용되고 최근에는 건강식품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양주나 포도주의 숙성에 쓰이는 오크통이란 것도 서양산 참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물을 맑히는 데도 숯은 최고의 기능재입니다. 간장을 담글때 숯 몇조각 넣는 풍습은 그 작은 실례지요.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 주변에도 다량의 숯이 묻혀있다고 합니다. 숯이 갖는 정화의 기능을 옛 선인들은 잘 알고 있던 겁니다.

 

               참나무숯의 기공


숯의 활용성은 숯이 가지는 놀라운 기공성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 숯 자체에 미세한 구멍이 많다는 것인데 이 구멍으로 미세한 물질을 흡수 흡착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세한 세균이나 VOCs(휘발성유기화합물)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유기화학물질과 대기오염물질들, 악취 유발 물질과 중금속과 같은 독성물 등 거의 모든 물질이 해당됩니다.

앞서 참나무로 만든 숯의 효능에 대해 언급했지만 무엇보다 참나무의 가치는 생태계에서 기능하는 참나무의 역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숲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데 참나무는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도토리는 물론 그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산 식구들의 귀중한 먹거리입니다. 겨울을 앞둔 산에서 도토리는 산의 동물들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먹이입니다. 참나무가 제공하는 또 다른 먹거리로 수액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참나무 수액은 곤충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입니다. 참나무에서 분비되는 수액은 자양분과 무기물이 풍부하여 곤충들에게 최고의 인기입니다. 수액이 분비되는 곳을 차지하기 위해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 말벌 등이 서로 엉켜 자리다툼을 하는 광경은 숲에선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참나무 한그루가 먹여살리는 동물이 최대 50여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비탈에 선 신갈나무


참나무의 가치는 숲의 관리 측면에서도 고려할 여지가 많습니다. 소나무와 같은  단순 침엽수림으로 조성된 숲은 특성상 산불에 취약하고 뿌리가 얕아 산사태가 나기 쉽습니다. 지난 90년대 이래 10여년 이상 강원도 영동권의 산야를 초토화한 산불은 거의 대부분 소나무 단순림으로 이루어진 이 지방의 산림특성에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소나무 단순림의 약점을 보완해줄 수종으로 우리 산야에 흔한 참나무는 유용한 대안입니다.

참나무 숲은 불에 강하고 뿌리의 강한 활착력은 경사가 심한 사면에서도 안정된 숲을 형성하여 비탈면을 굳건히 지탱해줍니다. 산불로 초토화된 산의 봄날 검게 타들어간 나무 밑동에서 터져 나오는 맹아는 이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산불로 헐벗은 산의 복원으로 소나무와 참나무로 구성된 혼합림이 흔히 거론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과거 오대산에서도 큰불이 있었다고 그럽니다. 노인봉에서 소황병산에 이르는 산등성이가 넓게 타들었습니다. 그 흔적인지 이 지역에선 전나무, 분비나무같은 침엽수림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숲은 비슷한 굵기의 맹아 줄기 여러가닥으로 형성된 나무들로 가득합니다. 신갈나무, 물푸레, 거제수 등의 활엽수가 산불로 폐허가 된 산을 다시금 일으켜 세운 흔적입니다.

      겨우살이 채취로 잘려진 신갈나무


신갈나무의 수난을 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6년 말에 한 방송사의 9시뉴스에 겨울살이에 항암 성분이 있다는 기사가 나온적이 있습니다. 방송후 오대산은 겨울살이를 채취하려는 약초꾼들로 몸살을 앓아야했습니다. 겨우살이가 기생하는 식물로 신갈나무가 표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한약재로 겨울살이가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이런 광풍은 분명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창창한 신갈나무들이 겨울살이를 노리는 꾼들의 손길아래 잘려나갔습니다. 높은 가지에 걸려있는 겨울살이를 따려고 나무를 벤것입니다.

          국립공원내 불법 채취 겨우살이


  깊은 눈속에서 언제 다시 잎을 틔울까 싶은 나무도 시절이 도래하면 피어나는 것이 자연입니다. 인간의 무지와 탐욕이 아니라면, 언제든 푸르른 세상을 이끌어 나갈 주인이 자연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 어떠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희성 시인의 ‘숲’ 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상왕봉의 신갈나무숲




천하지형세시호산천(天下之形勢視乎山川) - 물길의 위기 생명부양환경을 위하여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조선 영조 시대의 학자인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1769년)에 1대간, 1정간(장백정간), 13정맥으로 소개되어 현재까지 전하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이해하는 중요한 인문 지리적 개념입니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금강산을 지나 설악산 오대산 소백산 월악산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1,400km에 달하는 백두대간은 고래로 이 강산의 풍토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토의 등줄기였습니다. 백두대간의 개념은 역대 학자들이 편찬한 지리서나 지도의 제작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는 그 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지리산의 어느 산줄기 - 산하(山河), 산천(山川)을 이해하시겠지요

 

“천하지형세시호산천(天下之形勢視乎山川)” 풀어보면 ‘천하의 지형을 보고 사람들은 산천이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산천’말고도 우리가 흔히 쓰는 국토를 이름하는 말로 ‘산하(山河)’, ‘강산(江山)’, ‘산수(山水)’ 이 있는데 한결같이 산과 물길을 함께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산과 같이 어울려 이 땅을 이루는 강(江), 수(水) 하(河) 즉 물길의 존재입니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의 특성상 산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일이지만 거기엔 반드시 물길이 음양의 조화처럼 동반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대천의 물줄기 - 비로봉, 상왕봉, 두로령의 물줄기가 모여 흐른다

 

과거 헐벗었던 산들이 산림녹화의 성공으로 푸르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우리 산천의 물길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고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황폐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푸른 산빛에서 그 건강성과 산림녹화의 성공여부를 찾는다면 물길의 잣대는 투명하게 흐르는 물빛과 그 물길을 담는 수변공간의 자연성에서 찾아야 할 것임은 자명합니다.

 

오대산의 외곽인 황병산 자락의 해빙기 - 이곳에서 울고있는 물까마귀는 애처로웠다. 

 

그러나 오늘날 농경과 거주공간, 공업활동, 교통망 등 인간의 모든 활동이 물길주변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물길의 황폐화를 논하는 주장에 공감할수 있을 겁니다. 2006년의 소양강댐과 팔당댐의 흙탕물 정체건은 기상이변에 의한 집중강우의 탓도 있겠지만 강원도를 비롯한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길의 황폐함이 실질적 원인이었습니다.

 

 

2006년 수해로 인해 복구(?)가 진행중인 방아다리골의 모습


하천변 도로(거의 모든 도로는 하천변을 따라 조성되어 있음을 상기해보시라..)를 따라 가다보면 우리 시대의 물길의 현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국토의 물길이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성형화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치수(治水)만을 고려한 물길은 예외없이 석축이나 콘크리트에 의한 밋밋한 제방으로 갇혀져있고 상류 하류를 가릴것없이 도처에서 벌어지는 하천 공사는 자연스런 하천 경관에 필수적인 바위와 자갈 등의 무분별한 채굴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의 물길은 그저 물이 흘러가는 지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산리앞을 흐르는 오대천의 풍경, 아름답다 - 자연과 인공구조물의 조화(?)

 

시인 정지용이 그의 시 “향수”에서 묘사한 “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의 풍경은 어쩌면 이젠 우리의 추억속에서나 가능한 시공간일지 모릅니다.

 

 

 출입금지 구역인 개자니골의 가을


단조로운 물길에서 풍요로운 수 생태계를 기대할순 없습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길아래 깊은 소(沼)가 있고 층층히 흐르는 산중 계곡에서야 열목어와 산천어는 자랍니다. 물가에 흐드러진 갯버들과 수초 무성하고 모래와 자갈 큰 바위가 처처에 자리한 물길에서야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이 서식할수 있습니다. 그 종의 다양성은 곧  물고기와 연계되어 있는 수생태계 즉 조류(藻類), 새우, 강도래 같은 저서생물군, 남생이로 대표되는 파충류, 개구리로 대표되는 양서류, 왜가리 백로같은 물새들을 매개하게 됩니다. 수변 생태계의 건강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동물이 수달입니다. 수달이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어 있음은 우리 시대 물길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표징입니다. 


조릿대, 산을 지키는 지피식물들 생명부양환경을 위하여

 

 

 동대산오르는 길, 조릿대 군락

 

산에 다니다 보면 산길 주변이나 나무 밑에 무성한 조릿대를 보신 적 있을 겁니다. 오뉴월의 어느 햇빛 좋은날 이제 막 신록이 우거지는 숲길에서 나무사이로 부드럽게 햇빛은 드리우고 산들대는 바람이 조릿대 숲을 스치는 날 산길을 걸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런 날의 산행은 아무리 걸어도 지치진 않는 천상에서의 산책이라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이처럼 조릿대 같은 지피식물 없이 아름다운 숲이나 산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대산 능선의 봄, 피나물과 홀아비바람꽃


지피식물은 말 그대로 땅을 덮는 식물을 말합니다. 잔디를 비롯, 습기 찬 곳에 흔한 이끼류나 쇠뜨기, 속새, 조릿대, 돌단풍 등이 다 이에 포함됩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지피식물은 엄밀한 계통분류에 의한 기준은 아닙니다. 다분히 기능적인 역할에 주목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피식물의 특징은 대부분 키가 작고 군락을 지어 서식한다는 점입니다. 산이나 숲에 너무 흔하게 있어 그 존재가치가 폄하되기 쉬운데 오늘날 지피식물의 중요성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게 됐습니다.

 

 아홉싸리골의 속새군락


 

지피식물의 중요성은 잔디 없이 맨땅인 축구장이나 도로변에 위태로이 무너질 듯 붉은 흙이 노출된 비탈면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산이나 숲에서의 지피식물의 기능도 이와 같습니다. 피복에 의한 토양 지지 능력은 지피식물이 가진 기능 중 단연 최고입니다. 강우에 의한 토양침식 가능성이 높은 비탈지에서 조릿대와 같은 지피식물이 없다면 엄청난 양의 흙탕물이 계곡을 뒤덮고 산은 늘 무너지는 상황을 피할 길이 없을 겁니다.

 

 

 

   진고개의 오갈피밭, 비탈을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등산로 보호에도 지피식물의 역할은 큽니다. 지피식물은 사람들의 무분별한 발길에 등산로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침식되는 것을 견뎌냅니다. 비탈진 산길에서 무성한 산죽사이로 난 등산로가 그나마 강우 등의 침식에 오래 견뎌내는 것은 전적으로 지피식물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황병산늪의 이탄층, 그위에 자라는 식물들

 

지피식물의 중요한 역할에는 또한 강우시 저장능력이 있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식물들이 다 가지고 있는 특성이지만 지피식물의 경우 물의 함수(含水)능력은 숲의 활력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이끼의 함수능력은 매우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이끼의 겨우 자기몸무게의 15~20배이 물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은 산에서 삼을 캐고 나면 삼 집을 준비하는데 생나무의 껍질과 함께 반드시 준비하는 것이 주변에서 캐는 이끼입니다. 이끼 속에 보관된 삼이 오래도록 싱싱하게 유지됨을 옛 선일들은 잘 알고 있었던 거죠.

 

바위에 낀 이끼류, 낙엽이 지는 가을에도 짙푸르다


 

이끼의 탁월한 함수능력은 오랜 태곳적 바다에서 뭍에 오른 최초의 식물이 그네들의 선조인데서 연유합니다. 자신들의 원래 고향이 물속이었음을 잊지 않는 건 아닌지 재미있게 생각해봅니다. 이끼가 속한 식물군을 우리는 선태류라고 합니다. 이끼는 남극대륙에서도 북극해에서도 자랍니다. 다른 식물과 달리 뿌리가 아닌 온몸으로 물과 양분을 흡수하는 것은 이들의 특징입니다. 물이 가물 때에는 말라버리는데 이때도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몸 안의 물을 최소한으로 한 채 휴면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다시 물기를 맞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새파랗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숲속에서 이끼는 물을 필요로 하는 많은 동물들의 먹이감이 되기도 하고  집을 만드는 재료로도 쓰입니다. 거의 만능의 재료로 활용되는 거죠.

 

조개동골에서 발견한 산돼지 분만 자리

 

조릿대도 숲속 동물들에게 요긴하게 쓰입니다. 무성한 군락지는 수많은 동물들의 은신처로 손색이 없습니다. 위의 사진은 명계리 조개동 지역을 탐사하다 발견한 겁니다. 사진에선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찌나 포근하고 아담하게 만든 둥지던지--새가 만드는 둥지가 아님에도 둥지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더군요. 큰 나무아래 조릿대를 정교하게 잘라 바닥을 깔고 가새를 높게 둘러 어른 한사람이 눕기에 딱 좋을 정도의 크기로 만든 자리입니다. 처음에는 누가 이렇게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잠자리로 만들었나 생각할 정도로 너무 정교해서 놀랐는데 실은 출산을 앞둔 멧돼지가 만든 방이라 합니다. 새삼 놀라게 됐고 자연에 사는 동물들의 지혜와 솜씨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봄날, 진고개길의 은방울꽃 군락


 

조릿대의 사철 푸르른 잎과 열매는 다른 대부분의 식물들이 잎을 떨궈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철에 동물들에게 요긴한 먹거리가 됩니다. 긴 겨울이 끝나고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뱀이나 도마뱀은 조릿대에 맺힌 이슬을 먹고 몸을 추스르다 활동을 시작합니다. 곰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나면 조릿대 잎을 먹고 기운을 차린다고 합니다.

 


이밖에 생태계에서 조릿대의 역할로 영양물질을 붙잡아 두는 기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잔가지나 가을철 낙엽은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기 쉬운데 빼곡한 조릿대 숲에선 꼼짝없이 한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조릿대 숲에 갇힌 잔가지나 낙엽은 그대로 분해되어 다시 숲의 영양물질로 쓰이게 됩니다. 산속 숲에 따로 비료나 퇴비를 주지 않아도 다양한 식물들이 잘 자라게 되는 이유는 이런 조릿대 같은 지피식물과 덤불식물의 역할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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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늦게 깨어난다 풍경들

 

○○ 

오대산은 이제야 깨어난다. 서울에서 돌아오는 어느날 사무소 근처 아스팔트 길에 뛰어다니는 개구리를 보았으니 정말 이곳에도 봄은 찾아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냇물이 불어든 날이 언제쯤부터였을까. 비는 없어도 이따금 찾아드는 봄눈은 미미했어도 지난날 산중 깊이 쌓인 인연들은 하루하루 부풀어오르는 대지를 위해 스스로 몸을 푸는 것이다. 그 물가에 시절을 축복하듯 버들개지는 하얗게 피어나고 모여선 곳마다 연두빛으로 아스라하다. 아.. 네가 아직 열어보지 않은 편지에는 눈밭에 오른 북방산 개구리가 있었지. 그게 벌써 삼월 십일경이었다. 그 무렵 다른 소식에는 너희가 다녀간 오대천 계곡이 봄볕에 시나브로 풀리는 풍경도 있었었지.

 

너는 아니? 눈밭의 개구리랑 봄볕에 시나브로 풀리는 오대천 냇물이랑은 계절적 차이가 크다는 것을. 눈밭의 개구리는 좀 연출이긴 하지만 봄이 일찍 찾아드는 소금강계곡의 웅덩이에서 본 것이었어. 주변에는 그처럼 눈밭이 있어도 따뜻한 영동지역의 기후는 그들의 시간을 어김없이 찾아주었지. 녀석을 웅덩이에서 건져내어 눈밭에 올렸더니 부아가 나서 그렇게 볼 살을 잔뜩 부풀리고 있더라구. 얼마나 귀여운지..^^ 뒤집으면 꼼짝도 않고 죽은 시늉을 해. 산에는 저런애들이 많아. 저 북방산개구리 말고도 아무르산개구리, 계곡산개구리, 무당개구리, 물두꺼비 등이 깊은 산중에서 살아간단다.

 

그에 반해 오대천 쪽은 그 무렵에서야 냇물이 풀리고 있었으니 소금강에 비하면 삼주쯤이나 계절이 늦다고나 할까. 같은 오대산권역인데도 이처럼 영동과 영서 기후차이가 큰 건 백두대간 산줄기가 동해에 면해 길게 오대산을 가르고 있기 때문이야. 태백산맥이라고 하면 더 잘 알겠구나.


백두대간 줄기가 북서풍을 막아선 서쪽을 영서(嶺西), 동쪽을 영동(嶺東)지방이라고 부르지. 영서는 대륙에서 불어오는 기단의 영향아래 고산 내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이고, 영동지역은 동해에 면해 흐르는 난류의 영향이 큰 해양성 기후의 영향권에 들어있어 비슷한 위도라도 영동지방은 서울에 비해 훨씬 따뜻하지. 비슷한 날 국립공원내 영서와 영동의 대표적인 수계인 오대천과 소금강의 봄풍경이 그렇게 차이나는 것 결국백두대간이 만드는 조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거지. 우리가 알고있는 높새바람, 왜 있잖아? 푄(Fon)현상. 그것도 동해의 따뜻하고 습윤한 바람이 백두대간 산마루에 비바람, 눈을 뿌리고 고온 건조해져 영서지역으로 불어내리걸 말하는 거지. 너희들이 예전 만난 눈보라도 동해바다에서 넘어온 것들일께야. 이곳 오대산에 겨울눈이 많은건 그 때문이란다. 백두대간 줄기가 빚어내는 조화말이지. 이 백두대간을 경계로 물줄기도 멀리 남한강 줄기로 흘러들거나 아님 동해에 면한 하천으로 나뉜단다. 어디 기후나 물줄기뿐일까. 그 산골…나는 모든 사람의 거처는 다 산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뿐이지. 높은산에 올라 사람들의 거주지를 보아봐. 첩첩산중으로 둘러쌓인 우리들의 소박한 둥지를 …산 기슭에 얹혀 사는 우리들의 말씨나 풍속도 기후, 지리의 영향아래 차이가 생기는 것을.

 생강나무


○○

아...어쨌든 이곳 오대산에도 봄은 찾아왔단다. 복수초가 피어나지 벌써 오래 이제는 제비꽃도 노루귀도 설핏 보이고 볕바른 산기슭에는 노란 생강나무가 활짝 꽃망울을 피우고 있으니. 너에겐 나의 이 봄소식이 왠 때늦은 호들갑인가 싶겠지만 깊은 산 계절이 그 몸과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이 깊은 산중에선 시절 인연이 도래함이 얼마나 반갑고 기쁜일인지 모른다.

그러고보면 다들 제 있는 곳에서 시절의 도래함을 축복하고 반겨야할 일이다. 처한 곳은 다들지라도 자연의 숨결 우주의 시간은 마다하는 곳이 없음이니. 네가 사는 도시에선 도시의 봄이 펼쳐져 있을테니 말이지.


다람쥐의 봄맞이 풍경들


바람은 자작나무에 불고


   개자니골에는 낙엽이 진다
   낙엽이 졌다
   바람은 불어오고 불어가며 시간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나는 자작나무에 불어오던 시간을 기억한다

   붉은 물이 계곡으로 흐르던 날
   그리운 얼굴들은 물살따라 떠돌고 맴을 돌았다
   심중에는 아물거나 채 아물지 못한 흔적들이 물살처럼 맴돈다

  아 그리운 사랑 그리운 얼굴들
  가을 바람 가벼운 계곡 물살같은 인연인것을

청학동 소금강을 거닐며

  여름이 한창인 소금강 계곡에는 연록의 물줄기가 풍성히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등줄기로 후줄근하게 땀이 흐른다 하더라도 숲의 내음을 담은 저 푸른 물줄기는 계곡을 찾은 사람들을 마음에서부터 시원하게 적셔줍니다. 이곳이 작은 금강이라 불리는 오대산의 소금강계곡입니다. 산을 찾아 든 이들이 감탄하게 되는 연록의 물빛은 사실은 숲의 푸른빛이 물결에 내려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산이 깊으면 계곡도 깊은 법.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그 발문에서 “천하지형세시호산천(天下之形勢視乎山川)”이라 하였습니다. 천하의 형세를 보고 사람들은 산천(山川)이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산천은 강산(江山), 산하(山河)란 말과 함께 우리가 이 땅, 이 국토를 이르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한결같이 산과 물길을 함께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국토를 연상할 때 떠오르게 되는 장면들.. 검은 산줄기가 첩첩히 늘어선 연봉사이로 깊은 골 아래 굽이굽이 물줄기가 흘러가는 풍경은 우리의 무의식에 새겨진 이 국토에 대한 선연한 자기 인식의 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이육사 시인의 광야(曠野)에서도 산과 강은 함께 노래되는 것입니다.

.....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별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어디 이뿐일까요. 한국적 정취를 표현한 그림으로 유명한 운보 김기창 화백의 많은 그림에서도 산천(山川)은 하나의 어울림으로 표현됩니다. 그의 청산도(靑山圖) 연작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선현들의 옛 그림에서도 산과 강은 함께합니다. 오죽하면 전통화를 산수화(山水畵로)라고 불렀겠습니까.

 

 

 이처럼 산과 강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닌 하나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 절묘한 조화가 최고로 발현되는 곳이 오늘날 국립공원의 계곡입니다. 오대산의 소금강계곡, 설악산의 천불동, 수렴동계곡, 속리산의 화양계곡, 덕유산의 구천동 계곡 등의 수려한 풍경은 이제는 깊은 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한국 산천의 원형입니다.

 

 

 이곳 소금강 지대는 오대산을 가로지르는 6번 국도를 경계로 서쪽의 월정사 지구와 대비되는 곳입니다. 서쪽의 월정사 지구가 토산(土山)으로 편마암이 중심이 된 지질 특성을 보인다면 동쪽의 소금강 지대는 금강산, 설악산과 같은 화강암의 전형적 경관을 보여줍니다.

 

기후로도 백두대간 산줄기를 경계로 동해안으로 지대가 빠르게 낮아지는 동쪽의 소금강권이 온난한 반면 서쪽의 월정사 지구는 대부분 해발 600m 이상의 고지대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은 추운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입니다.

 

 

소금강 계곡은 노인봉~소황병산~매봉의 백두대간 줄기와 그 지선이 동해로 뻗어 백마봉, 천마봉을 잇는 너른 품안의 수많은 계곡이 모여 형성된 물줄기 입니다. 그 품에 안긴 계곡으로 이름 붙은 것만 해도 사문다지계곡, 선녀탕계곡, 구룡폭계곡, 은선계곡이 있습니다. 노인봉에서 시작한 소금강 계곡은 총 12km에 달하나 지금은 무릉계 안쪽 8km 남짓한 내소금강만을 소금강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소금강을 따라 오르다 보면 아름다운 소와 폭포가 연이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끕니다. 무릉계를 지나 십자소, 연하담, 식당암, 삼선암, 구룡폭, 만물상, 백운대,  삼폭포, 광폭포, 낙영폭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경치는 먼 길에 무거워질 법한 여행객의 발걸음을 가벼이 해줍니다.

 

개인적으로 푸른 물빛에 일렁이는 햇살을 좋아합니다. 연록의 물빛에 스민 햇살은 이미 빛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한 물의 한 속성으로 화하여 물의 표정을 더욱 풍부하게 합니다. 우리의 발길은 내처 계곡가에서 머물게 되고 그 설레는 마음은 여름의 한 추억으로 남습니다.


  물가의 정취를 잘 묘사한 시로 김용택 시인의 ‘그 그리운 시냇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흐르는 시내 모래 위에


물무늬처럼 이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흐르는 물 속에는 자리잡지 못한 모래알들이


그 작은 몸짓으로


빈 곳을 찾아가


반짝이며 자리잡기도 하는 몸짓들을


오래오래 보고 있었습니다


물가로 밀려난 잔물결들은


강기슭 풀밭에 가닿으며 사라지기도 하지만


허물어지지 않은 산도


저쪽 강기슭엔 있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눈에 어리다가


내 가슴 어딘가에 닿아


거짓말같이 번지는


물무늬 같은 사랑이


그 그리운 시냇가에 있었습니다


 

딱히 이제는 옛 정취를 찾기 힘든 내 고향 뒷 개울에도 시인의 표현처럼 ‘자리잡지 못한 모래알들이 그 작은 몸짓으로 빈곳을 찾아가 반짝이며 자리잡는’몸짓을 쳐다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일군의 동심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이제 중년의 문턱에 선 그 아이들이 아직도 ‘물가로 밀려난 잔 물결들을 바라보며 ... 거짓말같이 번지는 물무늬 같은 사랑’에 가슴 설레이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소금강 청학동 계곡을 지난 물줄기는 연곡천으로 흘러들어 동해로 흐르게 됩니다. 군데군데 보가 물줄기를 가로막고 있지만 아직도 이 물길로는 어느 정도 은어가 올라온다고 합니다. 보다 자연을 배려하는 우리의 물놀이가, 내 거주지에서 잘 정화된 생활오수가, 자연생태를 충분히 고려한 세심한 하천 행정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회유어들을 다시금 불러 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어느 때 소금강 저 깊은 계곡까지 거슬러 오르며 은빛 비늘을 반짝이던 은어떼를 다시금 보았으면 합니다.

 

 

 십자소의 깊은 심연을 지나 조금 가다보면 금강사가 나옵니다. 토담을 뚫고 선 소나무의 품격이 바라뵈지는 금강사 입구에는 담쟁이덩굴에 덮인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일주문으로 추측되는 이 작은 목조 건물은 일견 초라해보이지만 신갈나무가 드리우고 푸른 담쟁이잎새가 덮힌 이 여름날에는 어느 못지않게 화려해보입니다. 생명의 힘이겠지요. 지붕아래에는 오래된 공중전화 표지판이 담쟁이 덩굴에 묻혀 세월을 짐작케 해줍니다. 

 

여름날이라 탐방로 주변에는 버섯들이 많습니다. 나무에 붙어 자라는 것도 있고 땅을 뚫고 솟은 것, 낙엽층에서 피어나는 것 종류도 많습니다. 색깔이나 모양은 또 어찌나 기기묘묘한지요. 이들 버섯들엔 먹는 것도 있고 먹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그저 사람의 필요에 따라 판단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어 생명체 본래의 의미를 그 생명체 존재 자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많이 인색합니다. 그래서 식용버섯, 독버섯으로만 버섯류를 구별하는 것은 이 종족의 진면목을 이해하는데 매우 단선적인 이해를 가져다 줄뿐입니다.

 

 

버섯은 곰팡이와 함께 균류를 이루는 생물입니다. 엽록소가 없어 자체적으로 영양분을 조달하지 못해 고목이나 낙엽 등의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살아가는 생물입니다. 종류에 따라 다른 생물체와 공생관계를 이루기도 하고 어떤 것은 기생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송이버섯은 소나무와 공생관계를 이루어 살아가는 버섯입니다. 소나무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것은 송이 같은 균류가 양분과 물을 흡수하여 소나무에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버섯과 같은 균류의 의의는 유기체를 자연으로 돌리는 분해자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나고 죽는 생멸의 순환과정을 밟습니다. 죽은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생명체의 조직을 이루는 일부가 됩니다. 그 과정을 우리는 영양원의 순환과정이라 부릅니다. 영양원이 순환하기 위해서는 분해가 필수적입니다. 버섯은 그 과정을 맡는 족속의 대표적 고등생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학동 소금강 계곡을 따라 노인봉까지 오르는 먼 길에서 계곡만 보고 갈순 없습니다. 때로는 시선을 뭉게구름이 일어나는 하늘에 두어도 좋습니다. 그래서 만물상벼랑에 피어난 소나무가 하늘과 만난 지점에서 피어나는 한폭의 풍경화에 마음을 실어도 좋습니다. 지금은 이 경치를 하늘과 바람과 숲, 사람만이 누리지만 아마도 예전에는 비탈 벼랑을 오가는 산양도 이 경치를 즐겼을 것입니다.

 

산길을 가는 것은 시간을 잊으러 가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땀을 흘리며 가는 길에 마음이 허덕인다면 잠시 계곡을 바라보며 머리 위 푸른 하늘에 마음을 두며 한발을 내딛길 권고합니다. 정상이란 그렇게 가다보면 이르는 길이겠지요.

 

 


이 여름의 끝이 멀지 않은 듯 합니다. 이젠 새벽바람이 으슬하니 느껴지는 이곳 동산리에도 아직 한낮의 햇볕은 뜨겁지만 하루가 다르게 깊어가는 풀벌레의 울음소리는 멀지 않은 가을을 예감케 합니다. 이 여름 소금강의 시원한 풍경을 대하며 늦은 더위를 잠시 잊으시길 희망합니다.


붓꽃 피어나는 날


화단에 붓꽃이 피어났습니다

동해 바닷물같은 파란색의 꽃잎이 아름답습니다

미나리냉이 하얀 꽃이 진다음

화단은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가는데 

그 짙은 녹음만큼이나 새파란 붓꽃은 여름을 말하는 듯 싶습니다

뜨거운 햇살아래 이마는 금방 더워지는데

이 계절의 모든 식물이 자라고 번성하는 이 시간은 또

얼마나 가열찬 생명의 시간인지요

순간의 낭비없이 생육하는 저 모든 이웃들의 발걸음에 뒤쳐지지 않아야 겠습니다


화단에 피어난 노루귀



꽃샘추위에 오대천에 봄이 온다


꽃샘추위에 사무실에만 웅크린지 제법, 휴일을 맞아 기어이 냇가를 찾았다.

너희들이 다녀간지도 벌써 3주가 흘렀구나.

그때 뽀얗게 움을 틔우던 냇가 버들개지는 지금은 한무더기 꽃송이로 변신해서

노란 개나리 빛으로 줄기를 물들이며 냇가에 봄을 들이고 있단다.

그때 너희들은 많이 지쳐서 말없는 침묵으로 아직 두꺼운 얼음짱이 깔린 냇가에 시선을 주고 있었지.

그 냇가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들어 두꺼운 얼음짱은 흐르는 물살로 수런거리고 바야흐로 오대천은

"흐르는 강물처럼" 햇살에 빛난단다.



이제 삼월. 너희들의 시간에도 삼월은 새로운 인생의 흐름이 첫 물길을 튼 시간으로 남으리라 생각된다.

혹여나 돌이켜 지난 일주의 시간이 시시한 영화 한편 해치운 것마냥 인상깊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눈에 힘주고 또릿또릿한 저 아이들의 눈망울에 시선을 맞출 일이다.

그래서 저 아이들의 깨끝함에서 마음을 맑히고 저 아이들의 생동감에서 우리의 무기력을 떨쳐야 하리라.

희야. 그런 희망과 생명력을 나는 이곳 오대천에서 만나게 된단다.







보렴. 저 희망과 약동하는 생명력으로 부풀어오르는 버들개지의 뽀얀 눈망울을.

그것은 아마 네가 늘 마주하는 아이들의 발랄한 몸짓과 까만 눈동자에 다르지 않을꺼야.

지난번 애기했었지.

눈이 녹아든 자리에 이미 파랗게 돋아나 있는 새싹들을.

그것들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전 뒤집어 버리는 놀라움이었어.

나도 당연히 눈 녹은 자리에 벌써 파랗게 녀석들이 돋아나 있을줄은 생각을 못했거든.

그러고보면 희망이란 것 또한 절망의 심연에서 싹터오는 것임이 분명하구나.



깊은 숲속에선 이미 복수초가 만발하였다고 한다.

나는 아직 그 노란 꽃송이를 봄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다는 진객을 만나지 못했어.

그래도 오월초까진 우리를 기다려 준다고 하니 꼭 만나볼 일이다.

희야.

나는 네가 도시속에서의 바쁨에만 사람들 속에서의 자기 확인에서만 삶의 기쁨과 의미를 다 채우길 원치않는다.

그것은 분명 특정 조건에서만 충족되어지고 그마저도 언제든 상처받기 쉬운 기쁨이니까 말야.

 


나는 그것을 이곳에 들어와서 뼈저리게 배우고 있단다.

왜 홀로 있다고  견디기 힘든 고독에 휩싸이는지 ..왜 홀로 있다고 견딜 수없는 그리움에 몸을 가누기 힘든지.

그러면서 나는 본단다. 산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생명들을. 

바람만이 횡행하는 깊은 산 어두움을 헤치며 생명을 이어가는 수많은 목숨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본단다.

아..나는 얼마나 가냘픈 동물적 존재의 하나일뿐인가 하고.

존재란 얼마나 인간과 짐승의 차등이 없음을 나타내는 동등한 본질의 표현인 것인가 하고.

그렇다면 도시속 우리들의 웃음이란 그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잊어주기에 적합한 시스템의 산물일지 모른다.

본질적 한계의 모순은  접어둔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친구를 찾아 수다를 떨고 술자리에서 공허한 말장난을 즐기며 자신의 존재감을 떨치는 것인지 모른다. 

감당못할 말이 길어졌구나.

사회로의 첫 출발을 힘차게 내딛은 너희들의 앞날에 저 사진속의 봄날 만큼 따뜻함과 생동감이 가득하길 바래.

농가 주변 전신주에 새로운 해의 생명을 이어나갈 방울새 가족이 모습을 보였다.

하루가 다르게 땅은 푸르러지고 봄볕은 온기를 대지에 퍼뜨리겠지.

양지쪽 민들레 노란 꽃물이 밭고랑을 물들이고 분홍빛 진달래가 산길에 늘어설때 다시금 너희의 방문을 기다릴께.

이번엔 좀더 헐거운 시간으로 몸과 마음이 스스로 찾아가는 시간으로 만들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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